[cool] 자산 안 곽의 한국법사 이해 -《조선문명사》를 중심으로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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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2-12-18 02:2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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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래서 그는 외래의 것에 물들지 않은 고대사와 고대사상에 주목하고 연구하였다. 안 확은 생전에 5종의 저서와 140편의 글을 남겼다. 그가 추구한 고유성은 반고유성으로서의 외래성을 의식하는 가운데 확립될 수 있는 것이었다. 이상은 유준필, 앞의 논문(주 9), 110-129면.
해방 후에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급서로 직접적인 활동에까지 이르지 않았다. 이 중 제삼부, 제사부의 구상은 저서가 아니라 개별논문으로 발표된 것이 있다 이러한 저술체제는 안 확이 한말에 풍미한 사회진화론의 influence(영향), 특히 양계초의 『음영실문집』의 influence(영향)을 받은 것이다. 당시의 식민지라는 현실인식이 그의 국학사유체계 내에 편입되어, 그의 국학연구는 철저하게 Japan제국주의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`대타성`을 띠는 것이었다.
1923년에는 제일부에서는 2책, 제이부에서는 《자각론》 등 4책을 저술하였다. 《조선문명사》 첫머리에 제일부 조선문명사(전 8책), 제이부 자산학설집(전 8책), 제삼부 자산문집(전 7책), 제사부 정치논(전 20책), 총 43책으로 이루어진 안자산저서목록을 수록하고 있는데, 그는 방대한 저술을 구상한 듯하다. 이태진, 앞의 논문(주 8), 27-8면 참조.
안 확 국학의 근본정신은 민족적 자각에 바탕을 둔 민족고유성을 발견하는 것이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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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34년 이후 1946년 사망 때까지 안 확은 유랑의 세월을 보내며 더 이상 연구를 진전시키지 않았으며 1940년에 《시조시학》을 저술하고 그 동안의 연구를 요점하였다. 유준필, 앞의 논문(주 9), 31-2면.
그리고 당시에 풍미한 사회진화론의 influence(영향)을 받아 민족의 진보성을 확신하였고 이 진보성은 국학연구의 출발점이자 성과이었다. 유준필, 앞의 논문(주 9), 56-7면.
안 확은 …(생략(省略)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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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934년 이후 1946년 사망 때까지 안 확은 유랑의 세월을 보내며 더 이상 연구를 진전시키지 않았으며 1940년에 《시조시학》을 저술하고 ...
1934년 이후 1946년 사망 때까지 안 확은 유랑의 세월을 보내며 더 이상 연구를 진전시키지 않았으며 1940년에 《시조시학》을 저술하고 ... , 자산 안 곽의 한국법사 이해 -《조선문명사》를 중심으로-인문사회레포트 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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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. 이태진, 앞의 논문(주 8), 7-9면.
이러한 진보성은 한국의 history와 文化(culture) 를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되어 다른 나라와 비교하였다. 특히 제사부의 저술은 조선총독부의 정치에 대한 평가로 계획한 듯하다.